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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벌이 학교 한예종, 미래는 없다

 ‘황색 저널’을 표방한 <포럼삐>가 지난 5월 중순 무렵 현수막을 설치하고, 호외를 발간한 바 있었다. 축제 기간에 맞물려 교내에 내걸리는 바람에 ‘총학생회에서 설치했나?’ 하는 의구심을 낳은 현수막에는 예의 연꽃과 “씨발, 정말 좋습니다” 하는 문장이 함께 그려져 있었고, 커다란 종이 위에 양면으로 인쇄하여 여러 차례 접은 호외는 누런 박스 테이프가 그야말로 치덕치덕 붙여 있다고밖에 표현할 방도가 없는 칭따오 맥주 상자 속에 한 가득 꽂혀 있었다. 현수막은 다분히 도발적이었고, 상자 속의 호외는 가시의 곧추 세운 고슴도치처럼 퍼런 서슬이 느껴졌다.

 일련의 ‘도발’을 통해 그들이 고발하는 것은 영화 작업 스태프 가운데 하나인 ‘미술감독’에 대한 허와 실이다. 미술원 학생들로 추측되는 <포럼삐>의 대다수 필진들은 영화 작업과 미술감독에게 갖고 있던 막연한 동경과 관념이 대부분 환상에 지나지 않았으며, 실제로 진행된 영화 작업 속에선 염증과 환멸, 그리고 배신감만 확인할 수 있었다고 증언한다. (자세한 내막과 미술감독의 역할은 <포럼삐>의 1회 호외를 참고하기 바란다. 현재 인터넷 홈페이지도 개설되어 있다. http://www.bbbbb.co.cc/) 푸념과 독설, 냉소와 조언이 어지러이 뒤섞인 필진들의 글은 “유린당했다”는 표현으로 말끔히 정리된다. 이 정도 되면 거의 선전포고 수준에 가깝다.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작심하게 만들었는가? 

 한예종이 오래 전부터 목에 힘주며 내세우던 전공 간 교류와 통섭 프로젝트는 <포럼삐>의 증언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순전 “혀 굴리는 지랄”에 지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그것은 인정하기 어려운 사실이자 뼈아픈 오늘날 한예종의 모습이다. 현대 미학 이론의 최첨단이자 현명한 실천이라 할 수 있는 통섭―게다가 근사하게 들리기까지 한다―은 교내 행정과 교수진, 그리고 학생들의 절묘한 엇박자로 인해 우스꽝스러운 엉터리 댄스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는 학기마다 고전하는 수강 신청만 들여다봐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학교는 정녕 ‘교류’의 의지가 없다! 정작 중요한 수업은 제한이란 이름으로 막혀 있고, 개인적으로 면담을 요청해도 부정적인 대답만 돌아올 뿐이다. 제도적으로 교류의 장을 막아놓은 상태 속에서 학생들은 갈팡질팡한다. 허나 그 의구심도 학기가 진행될수록 ‘토할 만큼’ 압박해오는 전공 과제 속에 슬쩍 가려지기 마련이다. 정말이지, 진정한 통섭과 예술의 새롭고 자유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 싶다면 학교와 교수진은 그 머저리 같은 과제부터 없애야 할 것이다. 이쯤이 되면 학교에게 ‘교류’를 기대하는 것이 미친 발상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는데,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타 전공 학생들과의 만남을 도모할 수 있는 동아리 활동이라든가 교외 작업을 방해하는 것 역시 지나친 과제의 양 탓이다. 집에 돌아가 두 시간이라도 잘 수 있는 것이 학생들 대부분의 소원인 마당에 동아리는 무엇이며, 통섭은 무엇인가. 학교인지, 기술교육센터인지 구분이 어려울 지경이다.

 문제는 비단 학교 당국에게만 있지 않다. 애초에 학교는 정부와 정당과 마찬가지로 기대할 만한 것이 아님을 우리는 몇 차례의 경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결국 교류와 통섭을 꼰대들의 “혀 굴리는 지랄”이 아니라 실제로 만드는 것은 오롯이 학생들의 몫인 것이다. 그 사실을 <포럼삐>의 영악한 필진들은 간파하고 있다. 때문에 학교와 구조를 원망하는 시간 낭비는 더 이상 하지 말자. 그들이 진정 분노하는 것은 결국 우리들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포럼삐>의 고발과 우리 주변의 일화들을 통해 나는 하나의 결과를 도출할 수 있었다.
우리들은 소통을 원하지 않는다. 이것은 교내에만 적용되는 말이 아니다. 전 사회에 걸쳐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현상이자 징후이다. 연대를 꾀하며 소통을 갈구하지만, 동시에 끝없이 개별화로 쪼개지며 소통을 거부한다. 안타깝게도, 퍽 절묘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소셜 네트워크 역시 우리를 구원해줄 수 없다. 오히려 소통을 분산시키고, 관계를 파편화시켜 종국에는 이용자가 전부 떠나버린 온라인 게임처럼 허망할 뿐일 인스턴트 추억만 나뒹굴 것이다. 요컨대, 우리들의 관계는 우스운 게임이 되어버렸다. 손쉽게 관계를 맺고, 원한다면 너무도 쉽게 관계를 끊을 수 있고, 편의와 이해관계에 따라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 소통과 관계는 필연적으로 고통과 번거로움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생산할 수는 있으나 복원하기엔 너무도 미숙한 반쪽짜리 관계가 점점 늘고 있는 오늘날의 사회 구성원들이 소통을 거부하고, 그 대신 개인과 ‘최소한의’ 관계에 집중하는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다시 학교로 돌아오자. 학생들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소통과 관계가 아니라 결과물이다. 보다 좋은 “때깔”을 위해 오늘날의 학생들이 얼마나 공을 들이는지, 이제는 주객이 전도되어 결과물이 학생들의 등 위에 앉아 채찍질을 후려갈기며 제어하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영화 작업은 다수의 인력이 그야말로 ‘소비’되는 현장이다. 그 속에서 소통이 전제되어 있지 않다면 <포럼삐>의 증언처럼 미술감독과 미술부는 그저 소품 위치 조정하고, 페인트칠이나 종일 하고 앉아 있는 ‘몸빵’ 스태프로 소외되기 십상이다. 역할 구분이 상대적으로 명확하게 나누어져 있는 상업 영화 현장과는 달리 적은 예산과 인력으로 작업에 임해야 하는 학생 영화 같은 경우 ‘일단 바쁘니까’ 하는 식으로 설명 없이 일을 떠넘기는 경우도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영화 작업뿐만 아니라 현재 교내에서 교류와 통섭의 틀을 빌려 진행되고 있는 대다수의 작업 속에서 이러한 오류가 발생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론화의 필요성을 느낀다. 작업을 주도하는 주체가 있는 가운데 객체가 어정쩡하게 자리를 지키며 주문하는 대로 움직일 따름이다. 꽉 막힌 위계질서에서 ‘교류’는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작업을 위해 도구 부리듯 잠깐 쓰고는 끝나면 획 내버리는 인상마저 준다. 그렇게 하여 만든 결과물이 해외 유수의 대회에서 수상을 하는 것이, 언론 매체에게 조명을 받는 것이 대체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결과물의 완성도에 열을 올리는 노력의 절반, 아니 주먹만큼이라도 함께 작업한 사람들과 소통하는 시간을 가질 수는 없는지 되묻고 싶다.

 현수막을 내걸자 자신의 학생들이 벌인 소행이 아닐까 두려워 색출에 열을 올리는 교수들, 정권의 눈치를 보며 급조한 학칙을 핑계로 현수막과 포스터들을 말도 없이 철거하는 학교 관계자들, 소통에 관심 없는 작업자들이 판을 치는 ‘예술학교’ 한예종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그런 가운데 등장한 <포럼삐>는 미술과 발언의 경계가 사라질 앞으로의 활동을 제시함과 동시에 한예종이 은밀하게 감추고 있던 고름을 시원하게 터트리는 역할을 해주었다. 만약 이런 활동들이 교내에서 더욱 빈번하게 벌어진다면, 학교는 ‘허가 없는 부착물을 금한다’는 내용의 학칙을 더 이상 고집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것은 지난 2009년 비대위 사태 때 현수막과 포스터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자 학생들의 의견과는 상관없이 제정된 것으로, 이후 2010년 본관에 설치한 협동과정 개악 반대 걸개그림이나 기타 부착물을 제한할 때 기능을 발휘했다) 애초에 예술과 발언을 구분하고, 관리하려는 인식 자체가 터무니없다. 이렇듯 학교는 입맛대로 학생과 결과물을 적극적으로 조율하려 들고 있다. 이에 저항하는 학생들은 열정적일지언정 소수에 지나지 않고, 대다수의 학생들은 냉소적으로 침묵할 뿐이다. 시니컬한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쿨’하게 받아들여지길 기대하는 것은 이제 어리석은 일이다. 그것은 고작 학교의 관리를 용인하고, 그 틀 안으로 포섭되는 것을 도와주는 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앵벌이 마냥 교류를 구걸하는 한예종의 미래는 없다는 사실을. 논의는 거기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구성원 개개인이 주체적으로 나서야만 유린과 열패감의 끈을 끊을 수 있다. (이런 식이라면 차라리 학교 대신 미용실이 들어서는 건 어떨까? 한쪽에선 머리를 깎고, 한쪽에선 그림을 그리며, 낮부터 술을 마시며 격론을 벌이고, 저녁에는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온갖 공연들이 이어지는 그런 미용실 말이다. 자신의 예술적 재능들을 무정부주의적으로 펼칠 수 있다면 그게 더 ‘통섭’에 가깝지 않은가?)

 <포럼삐>의 활약으로 학교가 얼마나 변화했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소통 없는 작업은 여전하고 헤어날 수 없는 유령처럼 얽매인 과제에 허덕이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포럼삐>의 필진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나는 학생들의 반응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다. 우리 잘났다며 스스로 위안을 삼고자 현수막을 설치하고, 이 글을 쓰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답답하기 그지없는 학교에서 숨통을 틀 수 있는 그날까지 환멸에 빠지면 서로 의지하며 함께 노력하자. 죽이 되던 밥이 되던 그것 말고 뾰족한 수가 없지 않은가?
 

글쓴이 _ 흔한 남자 3.

※ 글의 제목「앵벌이 학교 한예종, 미래는 없다」는 무크지 시도와 가능성 3호에 실린
 “쟈크”의 칼럼「앵벌이 학교 한예종, 미래는 있는가?」에서 빌려왔다.



Posted by 또복 트랙백 0 : 댓글 3